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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공산악회의 멋과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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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임수
- 2018-06-05
- 조회수 562
퇴공산악회의 멋과 맛
류 근 만 이사
요즈음에는 일출시간이 빨라 오전 7시 반이면 해가 중천에 뜨는지라 나는 오늘 새벽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하지만 유성온천 지하철역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타야 할 열차가 막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퇴공산악회가 구 도청광장에서 7시 반에 소금산을 향해 출발하는 날이다. 나는 이십분 전쯤 여유 있게 도착할 심산으로 서둘렀는데 불과 몇 초 차이로 늦게 도착할 것만 같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하는 수 없이 평소 가까이 지내는 조합원에게 늦는 사정을 알리면서 좌석을 잡아달라고 스마트 폰으로 부탁을 했다. 나는 10분을 기다린 후 다음 지하철을 탔다. 버스 출발시간 전에 도착은 했지만 먼저 온 일행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우리 일행을 가득 태운버스는 미끄러지듯 출발하였다. 화창한 늦은 봄날의 날씨는 차안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을 창밖으로 유인하는 듯 했다. 맨 뒷좌석에 자리한 나는 정원이 넘게 승차한 일행의 뒷모습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평소 보이지 않았던 조합원, 부부가 함께 온 조합원도 여럿 눈에 띄었다. 이사장은 인사 겸 처음 참석한 조합원을 소개하고, 뒤이어 산악대장의 일정 안내가 있었다. 나는 방방곡곡 명소를 탐방할 수 있도록 매 번 일정을 짜는 산악대장의 노고에 찬사를 보낸다.
오늘 산행은 바로 내 딸이 살고 있는 원주시 소재 소금산 출렁다리이다. 나는 마치 딸네 집에 가는 기분이었다. 간현 주차장에서 하차하여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걷기 시작하였다. 대부분 공직에서 은퇴한지 꽤 된 나이이지만 아직은 모두가 몸과 마음이 한창인 듯 활기차보였다.
삼거리 이정표에서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방부목데크로 만들어진 등산로는 단체로 오르고 내려오는 학생들과 함께 등산객들로 붐볐다. 마침 우리 팀 중에 앞장서서 걷는 조합원이 있었다. 그는 지난 2월에 이곳을 다녀갔다면서 경험담을 설명하곤 했다. 꼬불꼬불 경사진 길을 따라 500여 미터를 걸어 전망대에 올랐다.
나는 출렁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서 원주에 사는 딸과 김포에 사는 아들, 그리고 아내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딸은 건강댄스 강사로, 아들은 회사에서 근무 중이라서 바쁠까 봐 따로 전화는 하지 않았다. 대신에 스마트 폰으로 전송된 사진을 본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엄마하고 같이 왔어? 언제 왔어?’ 반가운 기색이다. 딸네는 외손자. 손녀 등 네 식구가 다 집에서 가까워서 얼마 전에 함께 다녀갔다. 딸은 험한 길이니 조심하라고 당부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이어서 핸드폰에 문자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보낸 문자였다. ‘날씨가 많이 더워요! 쉬엄쉬엄 다니셔요’ 하고 걱정스런 내용이었다. 즉시 답변을 해 주는 자식들이 고마웠다.
출렁다리는 2018평창동계올림픽에 맞추어 개장된 산악 보도교중 국내 최장 최대 규모라고 한다. 높이 100미터 상공에 길이 200미터, 폭1.5미터로 걸어가는 동안 출렁이는 느낌의 멋과 풍경을 맛보았다. 다리 바닥은 뚫려 있어서 철판사이로 아찔함과 스릴이 넘쳐 현기증이 나는 듯했다. 여기저기서 괴성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출렁다리를 건너 나무계단 길을 한동안 더 오른 후, 우리 일행은 소금산 정상 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되어 404철 계단이 보였다.
그 곳에는 우리보다 앞서가던 타 지역의 나이 지긋한 산악회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철 계단을 보는 순간 큰 소리로 엄살을 떨었다. ‘나는 죽어도 못 간다.’ 면서 온 길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이다. 404철 계단은 거의 직각수준으로 70~80도의 급경사 계단이다. 폭도 좁아서 교행이 어렵다. 그래도 우리 일행은 60~70이 다 넘은 나이었지만 발길을 재촉하는 종종 걸음을 하였다. 등에 멘 짐을 풀어 곡간을 채울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404철 계단을 무사히 내려와 야영장의 자갈밭에 자리를 잡고 짐을 풀었다. 모두가 집에서 나올 때 아내들이 싸준 각종 반찬들이 푸짐해 보였다. 누가 내 놓았는지? 제일 먼저 나온 것은 소주병이었다. 종이컵에 반쯤 채운 소주잔을 높이 들고 ‘건강을 위하여!’를 외쳤다. 각자 들고 있는 잔을 한 입에 털어 넣고 ‘꼴깍‘ 넘기는 그 맛을 보기 위해 산악회에 참석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각자 준비해 온 반찬 또한 일품이었다. 밥은 산악대장이 주문을 하였기 각자 반찬만 준비한 것이다. 일행들과 야외에서 반주를 겸한 즐거운 점심식사를 마치고, 아쉽지만 다음 일정을 위해 서둘러 뒤처리를 해야 했다.
神勒寺
우리 일행은 다음 행선지인 여주의 천년고찰 신륵사에 들렀다.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
遷葬
려 말 나옹화상의 입적 후로 알려졌고, 조선시대 세종의 영릉을 여주로 천장한 1469년부터 조선왕실에서 신륵사를 원찰로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을 비롯하여 다수의 보물과 극낙보전 등 유형문화재를 둘러보았다. 신륵사 인근 능소면 소재 세종대왕 영릉을 찾았으나 공사관계로 입장할 수 없어 아쉬웠다. 다행히 세종대왕 역사문화관과 명성왕후 생가유적지만을 탐방하였다. 고종 3년(1866년)에 왕비(16세)로 책봉된 명성왕후는 지혜와 통찰력을 갖춘 뛰어난 외교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1895년 을미사변을 겪으면서 그해 10월 8일 경복궁내 건청궁(옥호루)에서 일본 놈들이 무참히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러 4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근대사를 쓴 사람이 역사를 왜곡하여 이를 바로잡기 위해 명성황후기념관과 생가를 복원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얕게나마 우리의 불운한 역사를 다시금 생각게 하는 기회였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뒤풀이 행사가 남았다. 장소가 마땅치 않아 음성휴게소 쉼터에 장소를 마련하였다. 산악대장의 아이디어가 ‘굿’이었다. 버스가 도착하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준비된 음식을 날라다 상을 차렸다. 특히 처음 참석한 나이 드신 사모님들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일정을 마무리하는 멋과 맛이 어우러진 피날레였다.
일정을 마치고 귀가하는 차내에서는 분위기가 전과 달랐다. 발랄함 보다는 정숙한 분위기, 춤과 노래로 여흥을 즐기면서도 난잡하지 않았다. 하루의 피로감을 풀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은 노신사의 흐뭇하고 편안한 얼굴도 보였다. 공직에서 은퇴한 후 6070의 노신사들로 모여진 퇴공산악회가 찐한 맛과 멋이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耆老 老鍊 老熟 老將
나는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모두가 기로의 나이, 노련 노숙 노장으로서, 늙은이가 아닌 어르신으로 함축된 퇴공조합 산악회원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