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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백기행
  • 조병욱
  • 2016-10-25
  • 조회수 225
삼백기행(三白紀行)
 
깊어가는 가을!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가절이다.
오곡백과가 무르익어가는 때에 여행은 더욱 가슴을 설레게 하고 어린 소년이 된 듯한 들뜬 심정에 흥얼거리듯 차창 넘어 만추의 풍경이 정겹게 다가온다.
오늘의 여정은 상주다. 상주는 역사적으로 매우 유서 깊은 고도이다.
이 곳은 고려 중기 金富軾(1075-1151)三國史記 一然(1206-1289)三國遺事에 보면 商州의 옛 지명은 沙伐州로 신라 첨해 왕(247-261)때 사벌국이 서기 249년에 신라에 복속 되였고 진흥왕 13(552)에 군사조직인 商州停(軍團 )을 두었으며 신문왕 5(685)에는 95 小京을 두면서 상주에 州治所를 설치했다.
신문왕 7(687)에 상주 성을 축조했는데 王山을 중심으로 둘레 1,549척 높이 9척이였다.
성안에는 동문에 控洛門 , 서문에 相露門 남문에 弘治舊樓, 북문에 玄武門이 있었고 太平 樓. 司令廳, 商山館22개 공공기관과 21개 우물, 2개 연못이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경덕왕 16(757) 사벌주를 상주로 개칭하고 , 혜공왕12(776)10(예천 의성 군위 청원 보은 영동 옥천과 안동 영주 청송 김천 일부를 편입 관할토록 한 것을 보면 오늘날의 도청소재지나 다름없는 웅도( 雄都)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 말 진성여왕 6(889)에 정치혼란으로 지방에 호족들이 농민들과 합세하여 봉기가 이어졌는데 상주에서는 元宗哀奴의 폭동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신라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였고 북원의 궁예, 후백제 견훤이 후삼국을 세웠는 데 甄萱(867-936)은 바로 상주 가은 현 출신이고 아버지는 호족이던 아자 개였다.
지금도 견훤이 군사를 양성했다는 견훤성이 상주 화북면 속리산 인근에 남아 있다.
고려 때는 왕명이나 공문서전달, 지방관파견, 특수물자수송 등을 수행하는 주요 驛站 이였고, 8중 하나며 충숙왕 원년(1314)에 경상도라 명명한 후 조선에 와서도 그대로 이어져왔다.
 
商州의 옛 지명은 上洛 .商山 . 沙伐로 불리다 신라 진흥왕 13(552)에 상주정을 설치하면서 상주란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상주는 북으로는 소백산맥으로 막혀있고 동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기온이 따스하고 비옥한 농경지에서는 벼농사와 감나무 그리고 뽕나무 재배가 이어져 왔는데 논에서는 쌀, 감나무에서는 곶감, 뽕나무에서는 명주실을 뽑는 꼬치가 잘 되었기에 , 곶감, 꼬치가 모두 흰색을 띠고 있어 三白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경상도 으뜸 고을 상주!
영남지방에서 경주 다음으로 큰 고을이었다. 이에 慶州商州 순으로 각 앞 글자를 따와 `慶尙道`라는 명칭이 만들어진다. 조선 선조 때 대구로 경상감영을 옮겨가는 바람에 상주는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한 회한의 중소도시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먼저 찾은 곳은 상주시 도서관 이였다.
 
오늘 한국공무원문학협회 회원인 이 지역 출신 이 옥금 시인이 팔순의 노구에도 왕성한 필력으로 첫 시집 노을 꽃을 출간하는 기념회가 있는 날이다.
기념회장에 들어가 시 낭송과 꽃다발을 전해 드리고 기념촬영을 하곤 맛있게 차린 음식을 즐기며 잔 들어 건배를 하면서 시집출간을 축하했다 .
 
 
도남서원(道南書院)
 
조선 선조 39(1606) 상주시 도남동에 창건되었으며 1676(숙종 2) 임금으로부터 편액을 받아 賜額書院이 되었다. 1797(정조 21) ·서재를 건립했고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나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손된 후 1992년 지역 유림들이 힘을 모아 강당에  이어 동·서재를 지었으며 2002년부터 대규모 복원이 이루어졌다.
 
경내에는 도정사, 정허루, 장판각 등이 들어서 있으며 해마다 음력 2, 8월 하순 정일(下旬 丁日)에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인물들에게 제사를 지낸다.書院에서는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노수신, 류성룡, 정경세, 이준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우리는 정허루(靜虛樓)에 올라 문화해설사의 정성스런 해설과 낭송에 박수를 보내고 나도 기백을 살려 鄭芝溶(1902-1950) 시인의 鄕愁를 낭송했다
.
경천대(擎天臺)
 
     오늘날 곶감하면 먼저 떠오르는 도시는 상주. 우리나라 곶감의 절반이상을 생산하는 곶감의 고장으로 경천대 가는 길에 불그레 익어 가는 만추의 풍경인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옛 고향 정경이 아스라이 떠올려 졌다. 이제 찾아가는 곳은 낙동강 제1경인 경천대 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상주 나들목으로 나오면 경천대 가는 도로표지판이 보이고 그곳에서 약 20여분이면 닿는 곳이다여행의 참 멋을 아는 사람들과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은 옛 부터 이곳을 다녀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경치가 빼어난 곳인데 상주 回上里 물돌이, 예천 내성천의 回龍浦, 안동 河回마을은 낙동강에서 손꼽히는 강물이 휘돌아 가는 곳이라 마을 이름에는 돌아올 회’()자가 들어 있는 이름난 명승지다.
경천대 가는 길은 바위를 밟고 조금 올라가면 된다. 경천대에서 굽이치는 낙동강 변과 푸른 수목에 조화된 암벽 그리고 뱃놀이하는 정경이 그림 같다.
낙동강 상주보가 들어서기 전에는 강 건너 회상리 마을엔 금모래벌이 있었다는데
4대강 사업으로 물이 불러난 지금은 강변의 모래벌이 살아져 아쉬움이 남았다.
 
경천대 바로 옆에는 조선 중기의 무신 鄭起龍(156216220) 장군이 임진왜란 때 거창, 금산 싸움에서 전공을 세우고 상주성을 탈환 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령에서 적장을 생포함은 물론 성주·합천· 초계· 의령· 경주· 울산을 수복했는데 장군이 `龍馬를 얻어 훈련을 하고 말에 먹이를 주던 바위를 파서 만든 유구가 아직도 남아 있어 그 당시의 장군의 충정을 회상해 보았다
그 아래 무우정이 있다. 무우정(舞雩亭)은 조선 중기 학자로 천문 ·지리 ·의학 ·복서(卜筮) ·음률(音律) ·병법(兵法) 등에도 능통하던 우담(雩潭) 蔡得沂 (1605-1636)선생이 지은 것이다. 천문을 관측하여 병자호란을 예측하기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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