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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바고 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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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욱
- 2016-07-27
- 조회수 358
담바고 애증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에 이 담바고는 잊혀 질 수 없는 영원한 추억이자 그리움의 대상 이다. 강열한 태양 아래서 피 땀을 흘려 가면서 훈련을 받다가도 ‘담바고'와 만나는 짧은 십 여분의 순간은 더없이 달콤하고 신바람이 났다. 시원한 그늘나무 아래서 심호흡하며 훈련병들과 함께 피워보는 그 맛은 아무리 힘들었던 일도 순간에 날려 버리고 마는 신통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담바고’는 임진왜란 후 처음 조선에 들어 올 때의 이름으로 ‘남쪽에서 들어 온 신비한 약초’ 라 하여 남초. 남령초. 라 부르기도 했으나 지금은 ‘담배’ 가 되었다.
의약품이 많지 않던 당시에는 신령한 귀한 약초로 인식 되면서 차와 술 대신에 담바고로 손님 접대를 하는 풍습이 생겼고 영. 정조 시대에 들어오면서 평민. 기생. 양반. 궁녀는 물론 임금도 즐겨 피웠으며 특히 정조는 애연가로 알려지고 있다. 하멜표류기(1668)에 조선 사람은 담배를 좋아하며 4.5세 어린 아이들까지 담바고를 피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담배는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로 열대 식물이지만 우리나라 산간 어느 지역에도 잘 자라서 농민들이 많이 재배 했다. 당시 담배 한 근은 은 한 냥으로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주는 고 부가가치 특산품 이였다. 담배작물재배로 커다란 부가 창출되면서 매관매직하는 사례도 있었고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 폐병을 앓다가 죽는 사람이 생겨나자 조정에 담배재배를 금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정조는 이 문제는 조정에서 처리할 일이 아니고 각 지방 감사가 알아서 할 사안이라고 보아 금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담배가 너무 많이 확산되자 유학자들은 유교사상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어린이와 여성. 부자지간이나 연장자 앞에서는 피우지 못하도록 흡연예절을 만들었고 일제시대는 담배를 전매품으로 수익의 대부분을 일인들이 장악하자 폭리에 항거하여 일본차관을 갚기 위해 국민의연금을 모금하면서 구국금연운동을 전개했으며 일부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흡연을 죄악시하기도 했었다.
내 고향은 담배를 지역 특산품으로 적극 장려하여 대다수 농민들이 재배 했다.
담배 농사는 가장 손이 많이 가고 힘든 작물 이였지만 잘하면 가을에 한 밑천을 잡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기에 많이 재배 했다.
내가 처음 담배를 피워 본 것은 초등학교 때다. 십 여리 학교 길에서 돌아 온 내게 고모님은 술 주전자를 들려주시며 오늘은 외양 풀을 하는 날이라 일꾼들 샛밥과 막걸리도 가지고 가야 하니 따라오라고 하였다.
맑은 가을 햇살은 따가웠고 광주리에 샛밥을 이고 가는 고모는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혀 흘러 내렸으나 산기슭 까지 먼 길을 한 번도 쉬지 않고 갔다.
외양 풀을 한 짐씩 짊어지고 내려온 일꾼들은 샛밥에 막걸리 한 대접을 거뜬히 마시고는 담배를 말아서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피우던 담배꽁초를 내던지고 내 이름을 부르며 너 한 번 피워 보라고 했다. 나는 아니한다고 했지만 한 번만 피워보라고 하도 권하여 한 모금 피웠는데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지고 온 몸과 팔 다리가 말을 안 듣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누어서 정신이 깨어나기만을 바랐으나 회복되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던 형이 나를 업고서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몇 번을 쉬곤 했다. 나는 목이 말라 엉금엉금 기어가서 도랑물을 마셨다. “아! 이럴 수가 물 한 모금 마셨더니 몽롱했던 정신이 확 깨어나는 것이 아닌 가 ”담배에 취했을 때는 물이 약이라는 것을 이때에 알았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 캠퍼스 안에서 톱스타 김승호 씨가 영화를 촬영하고 난 후에 벤취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서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더니 나보고 이리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는 검은 중절모자를 쓴 채 시가 한 대를 꺼내곤 지퍼 라이타에 불을 붙여 거나한 자세로 시가를 피우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도 멋있고 대 스타 만이 갖는 카리스마 같은 위엄을 실감하면서 정중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가를 몇 모금 피우고는 “한 모금 피워 봐” 하면서 내게 시가를 주는 것이 아닌 가. 나는 시가 맛이 어떨까 싶어 받아서 한 모금 피워 보았다. 역시나 시가에 조금 취하는 듯 했으나 옛날 같지는 않았다.
내가 시가를 돌려주자 그는 자네 기념으로 주는 것이니 갖으라고 했다. 나는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누런 담배 잎사귀를 그대로 말아 만든 손가락처럼 굵고 기다란 그 시가를 아주 오래도록 간직했던 기억이 난다.
1960년대 초 고향 마을 입구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군부대 에서는 시레이숀, 건빵, 말보르(Marlboro)담배, 등이 흘러 나왔다. 아버지께서 말보르 담배 한 갑을 얻어 오셔서 다 피우고 난 뒤에 빈 곽 속에 파랑새 담배 몇 개비를 넣어놓고 피우셨는데 마침 이웃 마을 사시는 아버지 친구 분들이 오셔서 이 담배를 나누어 피웠는데 “참으로 양 담배 맛이 좋군요 ” 하면서 처음 피워보는 양 담배 맛을 극찬하며 떠났다. 그들이 저만치 가고난 뒤에 아버지께서 ‘ 허허 웃으시면서 ' 양 담배 곽 속에는 파랑새 담배였는데 '라고 말씀하시니 나도 허허 웃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만큼 담배는 일상생활에 지극히 사랑받는 필수품이 되어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사랑방이나 골목길 어귀에도 흡연으로 인한 연기가 자욱했다. 담배농사를 짓는 마을이기에 담배를 별도로 사서 피우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건조된 담배 잎을 바싹 말리어 부수고 종이에 말아서 아니면 대꼬바리에 넣어서 피웠다. 사십대 이상 중년이 되면 담뱃대 길이에 따라 그 사람의 나이를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사십대 중반 쯤되면 한 뼘 남짓하고 환갑을 넘긴 노인은 담뱃대 길이가 한 팔 가까이 될 정도로 길었다.
군에 입대하여 배급되는 화랑담배 연기 속에 전우애가 깃들었고 사회에 진출하여 여가시간에 나누어 피우는 흡연 또한 직장 분위기 조성과 정보교환에 기여한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나는 담배를 배우지는 않았지만 직장동료들과 더불어 이 따끔 뻐꿈담배를 피워 보기도 했다. 그런데 담배를 꺼내 주기도 전에 친구들이 먼저 담배를 꺼내 주어 주머니 속에 담배는 늘 먼지가 가득하여 몇 번 버리곤 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 그렇게도 사랑받고 즐겨 피우던 담배가 세월이 흘러 어느덧 well-being시대를 맞아 담배는 건강생활에 암적 존재이고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얼마전 어느 뮤지컬 공연장에서 배우가 무대에서 담배 피우는 장면을 연기할 때 갑자기 ‘야 ! 담배 꺼’ 라고 객석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는가 하면 지하철 안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시민들로 부터 거센 저항을 받기도 했다. 이제는 공공장소 어디에도 흡연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자기 집에서도 흡연을 하지 못하고 밖에 나와서 피워야만 하니 애연가들에게는 엄청난 수난 시대를 맞고 있는 셈이다.
이제 거실이나 사무실은 물론이고 술집과 커피숍등 어디에도 잿털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떻게 이 같은 현상이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인식변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오십대 이상 장년층 애연가들은 수 십 년간 피워오던 담배를 가족들의 성화와 건강을 생각하여 끊는 사람들이 대다수 인데 반하여 청소넌들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흡연에 열광하고 있는 현상은 기성세대에 대한 향수나 반항적 인자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마도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영화 ‘황야의 무법자’(1966)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시가를 물고 광활한 황야를 바라보면서 내 뿜는 연기의 황홀한 모습이나, 선글라스를 쓴 저우룬파가 불타는 위폐로 담뱃불을 붙이는 ‘영웅본색’(1986)과 , 일등석 손님들이 호화로운 식사를 마친 뒤에 담배를 피우는 ‘타이타닉’(1997)등에서 남자들이 내품는 품격 높은 명연기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그런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새 해 들어 담배 값이 대폭 인상되자 금연하겠다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는 보도는 비흡연자에 희소식이 아닐 수 없지만 길거리나 버스 정류장과 후미진 곳에서 눈치를 보면서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들이나 성인들을 보느라면 더 이상 품격을 갖추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불가능해져 가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한 여름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이나 건물 주위에서 흡연에 여념이 없는 외로운 사람들의 초라한 표정에는 벼랑 끝에선 애연가들의 비장함이 느껴진다.
돌이켜보면 내 어린 시절에 담배꽁초를 피운 쓰디쓴 고통의 한 자락은 내게는 평생 금연을 신조로 살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니 오늘을 예견한 형들의 ‘ 값진 선물 ’ 이 아니 였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