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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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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욱
- 2016-07-23
- 조회수 360
전주기행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오월은 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여심이 가슴 속 깊은 어딘가에 꿈틀대고 있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니 구름이 잔뜩 낀 날씨에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 질 듯했지만 우산은 가지고 가지 않고 길을 나섰다. 대전에서 회원들을 만나 반갑게 손을 잡아보고 호남고속도로를 향해 달리는 차창 밖에는 농부들의 모내기하는 모습에서 아련한 옛 고향 생각에 잠시 젖어 보기도 한다. 오늘의 목적지는 전주다.
천년의 고도 전주는 한옥마을. 경기전. 전동성당 등 볼거리가 많아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곳이다. 전주에 도착하니 한국공무원문학협회원들이 나와서 우리를 반겨준다.
먼저 찾은 곳은 경기전 이였다.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태종 10년(1410년) 전주, 경주, 평양에 전각을 지어 태조의 초상화를 모셨다. 세종 24년(1442년)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으로 이름을 달리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경기전을 광해군 6년(1614년)에 다시 고쳐지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아산,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졌던 어진은 1614년 경기전이 중건되면서 다시 돌아왔다가 동학혁명 때 위봉산성으로 옮겨져 화를 면했으며 현재 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어진은 1872년 서울 영희전의 영정을 모본으로 해서 새로 그린 것이다.
어진은 빛이 좀 바랜 듯 확실하지 않았으나 뒤로 돌아들어가 어진박물관에서 태조 이성계의 모습과 영조. 정조. 헌종의 어진도 함께 볼 수 있었다 경역은 정전과 태조의 22대조이며 전주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 이한 부부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로 이루어져 있다. 경기전 부속 건물들을 살펴보면,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하급관원들이 거처인 수복청, 수문군들이 일을 보던 경덕헌, 말을 두던 마청, 제례의식을 위한 동재와 서재, 제향 때 사용하는 물건들을 보관하는 제기고, 임금의 음식을 만들거나 임금의 마실 물을 기르는 우물 어정, 제수용 음식을 만드는 방앗간 용실, 전사관이 집무하는 전사청 그리고 제사음식을 만들고 보관하던 조병창이 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이목대 자만마을 이였다.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승암산 자락에 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자만마을은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태어나 살았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이 안사는 이곳에서 살다가 삼척으로 갔고 후에 함경도 덕원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2012년 행정안전부의 공모사업으로 한옥마을 녹색둘레길 조성사업을 추진하여 오목대 육교난간 보수와 도색, 그리고 자만마을의 낡은 담장에 예쁜 벽화를 그리면서 한적하던 마을은 입소문을 타고 전주한옥마을 찾는 사람들이 벽화마을을 찾게 되었다.
마을벽화는 천년고도에 걸맞지 않아서 조선시대 산수화나 민화 그리고 현대화가 어우러진 벽화마을 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흐릿하던 날씨가 햇살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마을 찻집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오목대로 갔다.
흐릿하던 날씨가 햇살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마을 찻집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오목대로 갔다.
오목대는 전주시 풍남동에 위치한 정자이다. 1380년(고려 우왕 6)에 남원의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돌아가던 이성계 장군이 이곳에서 승전 잔치를 베푼 곳이다. 그 후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나서 여기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오목대라 했다. 이곳에는 전주대사습축제기간을 맞아 창을 하는 어린이들이 많이 모여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나무 그늘에 잠시 쉬었다가 한옥마을로 내려오는 길에는 수 백 년 된 느티나무가 이 마을의 터줏대감처럼 우뚝 서서 우리를 반겨주는 듯 했다.
전주 한옥마을은 전주시 완산구 교동, 풍남동 일대 마을로 일제강점기 때 성곽이 헐리고, 일본인들의 상가가 성안으로 자리하려고 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한옥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현재 당시의 한옥 700여 채가 남아 있다.
한옥마을 거리에 들어서니 주말을 맞아 나들이객들이 많았다. 한옥거리는 좌우 상가들로 순수한 한옥은 골목길로 들어가야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일부 개방된 한옥에 들어가 한지공예품. 한지체험관도 살펴보았다.
문화공간으로는 판소리·춤·타악 등 전통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전주전통문화센터, 막걸리·청주의 제조과정 관람과 시음까지 할 수 있는 전주전통술박물관, 숙박을 하면서 온돌과 대청마루 등 한옥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전주한옥생활체험관, 전통 공예품을 전시하는 전주공예품전시관 및 명품관 등도 있었다.
정오가 되면서 시장기가 돌아 맛있는 전주비빔밥으로 허기를 달래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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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찾은 곳은 전동성당 이였다.
전동성당은 언듯 보아도 고풍스러운데다 예술성이 뛰어난 건축물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난 세월의 아픔과 무게가 그대로 묻어 있는 본당 외부를 찬찬히 둘러본다. 화강암을 주춧돌로 사용한 본체의 벽은 붉은 벽돌을 사용했고, 얼핏 고딕양식의 버팀벽처럼 보이지만 장식으로 덧붙여진 벽에는 회벽돌을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지붕 위에 창이 달린 색 바랜 벽돌 건물과 거목이 어우러진 풍경은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해 준다.
1908년 명동성당 내부를 건축한 불란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성당이 착공되어 1931년에 완공된 전동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Romanesque style ) 으로‘둥근 아치가 주 모티브인 로마건축양식’ 과 동서양의 문화교류가 활발했던 비잔틴시대 건축물로 여러 개의 기둥을 세운 열주식과 둥근 ‘돔‘형의 혼합으로 지어진 비잔틴양식( 330 ~ 1453 터키 지역에 자리잡은 동서양 문명) 이였다. 호남 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중앙의 종탑과 양쪽 계단에는 비잔틴 양식의 돔을 올렸으며, 내부 석조 기둥에도 비잔틴 양식이 녹아 있다.
이 성당은 1791년 신해박해 때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이 참수형을 당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지며, 그 10년 후인 신유박해 때 유항검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처형된 장소에 성당을 지었다. 또한 그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진 남문 성곽의 성 돌을 주춧돌로 하여 세워져 있어 그 의미가 더욱 크다.
지금도 전주 지역은 물론 전국 가톨릭신자들의 성지로 참배객들이 끊이질 않고 있다.
전주가 천년고도임을 웅변해주고 있는 것은 바로 전주읍성의 남문 풍남문 이다.
1층이 정면 3칸, 측면 3칸, 2층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문루(重 層 門 樓)의 팔작지붕이다. 1768년(영조 44)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며 보물제 308호로 지정 되였다. 성벽의 일부를 형성하는 석축기대(石 築 基 臺) 중앙에 홍예문이 있으며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다. 하층 내부에 앞뒤 두 줄로 4개씩 세운 고주(高 柱: 여러 기둥 가운데 특별히 높은 기둥)가 그대로 연장해서 상층의 변주(邊 柱:)가 되었으며 이러한 기둥 배치는 한국 문루건축에서는 드문 형식이라 할 수 있다. 풍남문 로터리 시내버스 정류장에는 우리의 자랑스런 양봉선 시인의 ’다들 모를 거예요‘ 시가 정겹게 다가온다.
다들 모를 거예요
남들은 쉽게 말을 하지요
언제나 밝은 모습 보기 좋다고
하지만 다들 모를 거예요
밤마다 웃는 연습 한다는 것을.....
풍남문을 둘러보고 전통시장 안으로 들어가서, 목이 컬컬하던 차에 전주의 명물 ’모주‘ 한 잔에 여정의 시름을 달래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