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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베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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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욱
- 2016-07-18
- 조회수 362
할베의 삶
첫눈이 내린다.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함박눈이 내린다. 눈이 오는 날은 왜 그리도 기분이 좋은지 깡충깡충 뛰고 숨박꼭질 하던 내 어린 시절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서 수북하게 쌓인 눈 위를 걸으며 뒹굴기도 하고 눈싸움에 눈사람을 만들어 보고도 싶다.
그런데 세월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내가 “인생칠십고래희 (人生七十古來稀)” 라고 고희(古稀)를 지나고 나니 흘러간 시간들이 너무도 아쉽고 돌이킬 수 없으매 가슴 한구석 허전한 느낌은 청운의 꿈을 가득 품고 내일의 푸르른 희망을 향해 줄기차게 내 달였던 그 젊은 날, 밤을 낮 삼아 책을 읽고 , 일을 해도 지칠 줄 모르던 체력이 이제는 조금만 걸어도, 잠을 설쳐도, 쉬 피곤함을 느끼곤 하니 아마도 노쇠해져 가는데서 오는 것임을 알 듯하다.
나는 아들 형제를 두었다. 이제는 모두 가정을 꾸미고 자식들 까지 두었으니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면 손주들이 달려와 내게 안기면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를 연발하면 나는 어느새 할아버지가 된다. 까칠해진 내 볼과 주름 살 투성 이지만 내 품에 안기는 손주의 포동포동한 손등과 여리디 여린 아가의 따끈따끈한 볼이 와 닿으면 문득 아 ! 나라는 사람! 그 옛날 나도 이런 어린 시절이 있었겠지, 어머니 날 낳으시고 강보에 싸인 채 엄마 젖을 먹고 쌔근쌔근 잠자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주시던 엄마의 정성스런 노고와 지고지순한 모습에 먹을 것을 달라, 업어 달라, 울고 불며 보채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지나온 세월 물 흐르듯이 쉬지 않고 달려오다 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돌아보면 내 인생 즐거운 날도 힘든 날도 많았다. 그 긴 세월 그토록 먼 길을 돌고 돌아 여기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직장에서 물러 난지 십여 년이 지났지만 남은 내 여생이 얼마나 더 남아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풋풋했던 젊은 날들은 다 흘러가고 늙고 쇠약해진 몸으로 노후를 어찌 살아가야하나! 초겨울을 향해 달려가는 이때에 눈이 부시도록 푸르던 낙엽은 다 떨어지고 나목이 되어버린 채 세찬 바람이 스쳐 지날 때면 쎄-엥하는 마찰음이 귀청을 울려 주는 순간 나도 저 나목처럼 내 곁에 부모형제와 다정한 친구들 그리고 나를 아는 지인들이 하나 둘 떠나고 쓸쓸하고 외로운 처지가 되지 않을까 ? 언제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순간은 다가 올 것이다. 할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늙는다는 것이고 그 늙음은 외로워지는 것을 하루하루 연습하는 시간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평생 내 반쪽이고 내 삶의 반려자인 사랑하는 아내와도 어쩔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을 맞아 누군가는 더욱 슬프고 허전하며 혼자만의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야 할 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늙어가는 노후가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며 서글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의학의 눈부신 발전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00세 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요즈음 칠십 세가 넘었다고 해도 칠십대는 청년이란 말도 심심찮게 사람들에 회자되고 있음에 선뜻 경로당을 찾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노익장을 과시라도 하듯이 동료나 취미동아리들과 어울려 운동을 하거나 봉사활동도 하고 등산을 다니기도 한다.
또한 자식들 다 가르치고 출가시켜 놓은 때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정한 친구나 학교 동창들 끼리 그룹을 만들어 자주 만나 외식도 하고 국내외 여행을 가기도 하니 노후에 즐거움의 참 맛과 삶의 의미를 실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대전 시내를 흐르는 유등천변을 나갔다가 이목이 수려하고 연세가 지긋하신 어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90세가 넘으신 분이셨다. 그는 젊어서 일본 도쿄 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의 과거는 말하지 않았으나 매일 일어나면 체력관리에 영어와 일어TV를 시청하고 신문을 안경도 쓰지 않고 읽으며 정오가 지나면 천변을 걷는다고 했다. 늙어서도 노인이라는 서러움이나 서글픈 생각을 갖기 보다는 스스로 넉넉한 마음씨를 갖고 일상사를 긍정하고 감사하면서 살다 보면 그 연세에도 청년 부럽지 않은 생을 살아 갈 수가 있다는 것에 나는 마음속으로 크게 감동했다. 사람이 태여 나 늙고 병 들어가는 것은 무척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이제 나이의 많고 적음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때가 되었다. 어떻게 어떤 생각과 행동으로 살아 가느냐하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는 말의 진의를 이제는 알 듯 했다.
그렇다! “사람이 낳고 죽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 고 하지 않는가?
나의 지인들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고 나 또한 머지않아 그 길을 걸어갈지라도 살아있는 동안은 하루하루 신나게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흥미진진한 나날에 평온한 생각과 즐길 걸이를 생각하다보면 남이야 늙고 병든, 쓸모없는 노친네, 라고 한들 내 마음속에서 만은 나는 늘 청춘의 그 날들을 구가하고 싶다. 오늘이 즐거우면 내일 모래도 즐겁고 행복할 것이다. 그럴 것이다. 왜! “나는 현재 살아 있다는 것이며, 이 보다 더 소중하고 행복한 것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행복하고 건강한 노후를 위해 부지런히 건강관리를 하고 소일거리를 찾는 것도 좋지만 아무런 할 일이 없어도, 병들어 누어있어도, 마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홀로 있어도, 병석에 누어있어도, 사람이 찾아오든 오지 않던, 연락이 되거나 아니 되거나, 행복한 사람이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쁘고 즐겁고 슬픈 일이나 노여운 일에도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격한 반응은 자제하며 살아가야 하리라.
왜냐하면 앞으로 다가올 다반사가 생.노.병.사. 와 관련되어 있고 지금까지 늘 무수히 겪어 온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들이기에 말이다.
“할아버지” 라는 말은 경상도 방언에 ‘할베’ 라고 부르는데 “할“은 ‘하늘’ 숭배‘ 높임’을 의미하고 있음으로 아버지의 윗 아버지로 할아버지란 말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 할아버지란 자식을 둔 대다수 사람들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불리 워 질 이름이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할아버지 , 할머니 소리 듣기를 싫어한다고 한다.
물론 한참 중년인 사람에게 할아버지 호칭은 늙은이의 상징이기에 그렇게 부르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으나 60대 이상인 사람이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것은 그렇게 못마땅하게 여길 일은 아니라고 본다.
요즈음 결혼 연령이 높아지고 결혼하고도 아이를 한 두 명도 아니 낳으려는 부부들이 늘어 감에 따라 60대가 되었어도 손주를 안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아니한데 며칠 전 60대로 보이는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어린아이가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고 무척 언짢아하는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고맙구나 하는 마음을 가져도 될 텐데 연령은 육십 대라도 마음은 아직 청춘 같다는 자신 만의 생각에서 연륜이 쌓여 감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보고 싶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집에서 학교 가는 도중에 높은 고개가 있었다. 그런데 이따금 꼬부랑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오시는 것을 보고 어쩌면 저리도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을까? 생각하곤 “꼬부랑 할머니” 라고 친구들과 동요를 부르듯이 할머니를 놀린 적이 있었다.
내 조부님은 칠십 세가 넘도록 병 한번 앓으시지 않고 약도 들지 않으셨지만 건강한 삶을 살 으셨다. 고희가 되시던 해에 방앗간에서 쌀 한가마니를 지고서 조그마한 고개를 넘어 오신 적이 있었는데 젊은 사람도 힘들고 어렵다고 할 그 일을 그 연세에 해내신 것이다.
그 당시 할아버지께서 ‘아직도 힘이 쓸 만하구먼!’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할아버님의 건강을 물려받았다면 나도 무척이나 건강할 텐데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나는 고혈압과 발목통증으로 고생을 하지만 다른 이상 징후만 없다면 나름대로의 건강한 생활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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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고향 선산에서 시제를 올리면서 어르신들 모두 떠나시고 내가 집안의 윗사람이 되어있음에 나는 언제쯤 할아버지처럼 늙어 질까 ?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내가 벌써 할아버지의 그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세월의 무심함 속에 아! 그 옛날 꼬부랑 할머니라고 놀리고, 노인들이 늙어 가는 것을 의아해 했던 나의 철부지적 어리석고 무지몽매했음을 크게 뉘우치면서 남은여생은 연륜에 걸맞게 생각과 말과 행동에 신중을 기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