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측이 상대방을 감시하기 위한 시계확보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조선
3개 초소에 둘러싸인 제3초소 부근에 미루나무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있
어 이를 제대로 관측할 수가 없었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주한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조지 보니파
위시하여 소대장 마크 토머스 배럿(Mark Thomas Barrett, 1951년 6월 9
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린 미루나무의
타나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미루나무의 위치가 유엔군 측의 관할에 속했
기에 보수작업을 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보니파스 대위는 경비중대
장 직권으로 작업을 계속 지시하였다. 인근 초소의 인민군 부사관과 병 20
여명은 경비 병력을 요청받고 트럭을 이용하여 도착하였다. 박철 중위의
작업 중지 재요구를 보니파스 대위가 거부하자 박철의 공격명령에 따라 인
자들이 작업에 쓰려고 가져왔던 도끼 등을 빼앗아 휘두르며 기습하였다. 이
들은 유엔군측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집중 공격을 가하여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가 이마에 중상을 입고 이송 중 사망하였으며,
주한 미군 부사관과 병 4명, 국군 장교와 부사관과 병 4명 등이 중경상을
입었고, 유엔군측 트럭 3대가 파손되었다.[2]
남한과 미국의 대응[편집]
며 美 국무성과 함께 "이 사건의 결과로 빚어지는 어떠한 사태에 대해서
도 그 책임은 북조선에 있다"는 공동성명을 당일에 발표하였다. 또한 제
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스틸웰 주한미군 사령관은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고 공동경비구역 내에 인민군이 설치한 불법 방벽(防壁;
바리게이트 등)을 제거하기 위한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
미국 전설에 등장하는 거구의 나무꾼 폴 버니언에서 따온 작전명)을 기본
폴 버니언 작전 시 유엔군은 데프콘 2(공격준비태세)를 발령하였다. 미국
본토에서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전투기 20대가 한반도로 긴급 파견
륙한 F-4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였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함 5척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하여 한국 해역인근에 배치되었다.
지휘관으로 하고 64인의 특전사 대원들로 구성된 결사대가 편성되어 보복
로 위장한 64명의 특전사 요원들은 공동경비구역 내에서의 폴 버니언 작전
에 투입되어 인민군 초소 4개를 파괴하였다. 인민군이 이에 무력대응할 경
우엔 과감히 사살하여 보복을 완료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세
에 겁을 먹은 인민군이 이에 대응하지 않고 물러서서 더 이상의 무력사태로
폴 버니언 작전 종결 후 북조선은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 주석 직에
있던 김일성의 '유감성명'을 전달했다. 처음에 미국은 북조선의 유감성명
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다가 24시간 만에
태도를 바꿔 이를 수락하였다. 북조선은 1년 반 동안이나 준전시상태를
풀지 않았고, 남한도 북조선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등 사건의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 사건 당사자인 미국이 빠진 상태에서 남한과 북조
선 간의 군사적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 이후 판문점 내의 공동경비구역에
서도 경계가 설정되었으며, 경계 밖 상대 지역에 존재하던 초소는 철거되
었으며, 혼응토 단으로 경계를 표시하였다. 사건 10주년인 1986년 8월
18일에는 근처에 있는 캠프 키티호크(Camp Kitty Hawk)가 보니파스 대위
문제의 미루나무는 완잔 제거한다음 동판에싸여 아레와같은 문구가 사겨저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