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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글 : 老年 4苦〉청촌수필(윤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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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임수
- 2015-04-27
- 조회수 551
초대 에세이
老年 4苦
윤 승 원 (수필가, 전 대덕경찰서 정보관)
삶은 유한하다. 종착역 없는 인생은 없다. 아무리 가진 게 많아도, 높은 지위와 명예를 누려도, 노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노인들은 추억을 반추하면서 산다. 꿈길처럼 화려했던 과거도, 눈물겹게 힘들었던 과거도, 돌아다보면 그리운 세월이다.
곡절과 시련이 많았던 노인일수록 이야기가 많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여전히 인정받고 싶어 한다. 꽃은 시들면 추하다. 사람도 늙으면 육신은 보잘것없지만 건강한 정신으로 창조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노년의 삶은 아름답다.
건강을 잘 지키면서 마음의 풍요를 누리는 노인의 얼굴은 편안해 보인다. ‘곱게 늙었다’는 소리는 그래서 노인들에게는 최상의 찬사다. 곱게 늙으려면 신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건강해야 한다. 그런데 뜻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다.
이 시대 노인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가난, 질병, 고독이다. 이를 ‘노년 3고(三苦)’라 한다. 3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도 해당이 안 되는 노년은 ‘행복’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흔치 않은 일이다. 3가지 고통도 이겨내기 어려운 명제인데, 또 한 가지 추가할 일이 생긴다.
하고 싶은 말을 제 때 하지 못하고 사는 일이다. 자식, 며느리, 손자 앞에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산다. 말씀을 절제하는 것도 좋지만, 제 때 감정표현을 하지 못하고 사는 노인들은 쓸쓸하다. 이것이 쌓이면 화병(火病)이 되고 우울증이 된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노인들도 있다.
세상 사람들은 걸핏하면 ‘열린 가슴’을 말하고, ‘소통’을 이야기하지만 노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젊은이들은 많지 않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서울의 한 자치구에서는 65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어르신 큰소리 지르기 대회’라는 이색적인 행사를 개최했다고 한다.
어르신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스트레스와 평소 하고 싶었던 말씀을 5초간 시원하게 외치는 프로그램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느 노인이 힘들게 고함을 지를까 싶지만 반응은 예상외라고 한다. 목소리를 들어 보면 건강상태도 알 수 있다.
의욕은 넘쳐도 안타깝게도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큰 소리를 내지 못하는 노인도 있다. 이 ‘큰소리 지르기’ 대회는 정상 혈압(80∼120)의 참가자 위주로 심사를 하는데, 지난해 어느 노인은 예선에서 혈압이 150이나 되는데도 “꼭 나가고 싶다”며 5번이나 재 측정했다니, 노인이 정작 ‘외치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진다.
기백이 여전히 살아있는 노인들의 ‘훈시형 목소리’도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 어느 82세 할아버지는 “버릇없는 요즘 아이들 바로잡으려면 집중하기와 정신 차리기부터 시키자”며 “열중 쉬어! 전체 차렷!”을 외치기도 했고, 77세의 어느 할아버지는 “용돈 좀 많이 줘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던 노인의 ‘큰소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들과 며느리를 향해 “얘들아, 손자 키우기 힘들다”라고 외친 73세의 할아버지가 우승을 차지했는데, 목소리 크기는 무려 106dB이었다고 한다.
퇴직 후 맞벌이인 아들 부부의 손자를 돌보는 이 어르신은 “아침에 밥 먹여 유치원 보내는데 1시간이 걸린다”며 “손자 키우는 게 얼마나 고달프면 우승까지 했겠느냐”고 웃었다고 한다. 올해엔 예선을 통과한 어르신 20여명이 참가했는데 개인전뿐만 아니라 1·2·3세대가 함께 소리를 지르는 이벤트도 펼쳐졌다고 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연히 말수가 많아진다. 말수가 많은 노인을 젊은이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지겨운 ‘노인네 잔소리’로 여긴다. 그러나 오래 사실 분들이 아니다. 돌아가시고 나면 잔소리마저 그리워지는 게 자식의 마음이다.
옛 어르신들은 ‘큰 기침’을 자주 하셨다. 헛기침이었다. 그 기침 속에는 권위와 위엄이 들어 있었다. 큰 기침은 어르신의 상징이었다. 동네 골목에서 어르신의 기침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은 온순해졌다. 못마땅한 것을 보더라도 말씀으로 꾸짖기보다 큰 기침으로 대신하셨던 선친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어르신 큰소리 지르기 대회’도 뜻있는 일이지만 집안에서 ‘큰 기침’하시는 어르신의 깊은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젊은이가 진정한 효자효부다. 효는 부모가 좋아하는 것을 해드리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옛 가르침도 새겨 봄직하다.
가뜩이나 ‘3苦’에 힘들어 하시는 노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터놓고 하시도록 젊은이들은 진지하게 경청하는 자세를 보여드렸으면 한다. 노인은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내일의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 작가의 말 : <퇴직공무원협동조합>에서 임직원으로 종사하시거나 이미 입회하신 회원, 또는 미래의 회원(현직 공무원)이라면 ‘노년 4苦’를 크게 걱정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한평생 박봉을 쪼개어 기여금 명목으로 부은 연금(年金)이 비록 작은 액수일지라도 노후에 기본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니, 이른 바 ‘빈궁의 고통’에서 가까스로 벗어 날 수 있으며, ‘퇴직공무원조합’이라는 남다른 자긍심을 가진 공익단체에서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함께 이따금 소주 한잔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있으니, ‘고독의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하고 싶은 말’ 가슴에 담아두고 제 때 내뱉지 못하여 이른 바 화병(火病)을 키우는 일도 슬기로운 전직 공무원들은 스스로 만들어가지 않는다. 우리 사회 도처의 잘못된 현상을 보고도 침묵하거나 수수방관하지 하고 따끔하게 바로잡아주는 이 시대 ‘올곧은 어르신 역할’을 제대로 하고 계신 분들이니, ‘노년 4苦’ 중 반(半) 이상은 스스로 해소하고 산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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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윤승원(尹昇遠)
전 대덕경찰서 치안정책 정보관(경감퇴직), 대전수필문학회장, 금강일보 논설위원 역임, ‘경찰문화대전’ 금상 수상, 제6회 문학시대 문학대상 수상, 조선일보 창간90주년 기념 사연공모 최우수작 당선, 수필집《청촌수필》외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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